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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20년 8월 25일부터 9월 4일 새벽까지 코로나 시대에 혼자 가 본 아프리카 출장기를 사진과 동영상 그리고 기억에 근거해 기록해 둔다.

 

해외 입국자에 대한 14일간의 의무 자가 격리 기간이라는 시간을 견뎌 보자는 의도도 있지만, 코로나 시대에 아프리카를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찾아볼 수 없어 기록해 본다는 의도도 있다.

 

물론, 나는 출장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수차례, 아프리카 현지에서 2번, 귀국해서 1번 코로나 테스트를 받았으며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고, 출장기를 포스트 하고 있는 지금, 비어있는 부산의 어머니 집에서 자가 격리 중에 있다.


케냐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두바이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된, 마라톤 감독님의 말씀대로 나이로비의 새벽은 쌀쌀했다.

 

'여기 아프리카 맞어? 이거 완전히 한국의 가을 날씨네.'

 

[새벽 5시에 눈이 떠져 내려가 본 호텔의 야외 라운지에 앉아 있는데,  어떤 새의 울음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청아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순조로운 출장을 암시하는 소리이길 바랐다.]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어 한기를 느낀 탓인지, 약속 시간 보다 한참 이른 새벽 5시에 잠에서 깨어, 서울 팀과의 전화 회의를 요청했다. 케냐보다 3시간 느린 가나에 있는 Y는 지금 새벽 3시일 테니.   

 

[새벽에 일어나 들여다 본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 동영상을 케냐에서는 볼 수 없었다]

 

코로나 팬데믹인 이 시국에 굳이 내가 케냐로 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 John 의 의도가 무엇인지 아직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긴 시간의 여정과 나이로비에서의 첫날밤을 핑계 삼아 늘어지게 늦잠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빨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John 의 회사 사람과 함께 두바이로 이동해, 서울 팀의 또 다른 멤버와 두바이에서 합류해야 했다.

 

약속 시간 보다 삼십 분 일찍 준비해서 로비로 내려와 있던 나에게 John 이 연락을 해 왔다.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정도 늦게 도착할 것 같아서 연락했어.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 줘. Calvin 과 함께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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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로비 한 쪽, 비즈니스 센터로 이름 붙여진 책상 중 하나에 비치되어 있던 'HYUIDNAI' 모니터. '현대'의 짝퉁인 모양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국어, 스위스 그리고 아프리카가 서로 연결된 이유와도 상관이 있었다.]  

 

호텔 로비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나이로비의 '기린 호텔 투어'를 광고하는 배너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로비를 떠나는 비행기가 토요일 밤 비행기니까,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돼서 토요일 오전에는 '기린'이라도 한 번 보러 갈 수 있으면 좋겠네.'

 

늦게 찾아온 John 과 Calvin 은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에다가 코로나로 인한 통행금지 때문에 관공서의 업무시간마저 콤팩트해져서 나이로비의 교통 체증이 더 심해졌다며 툴툴거렸다.

 

[John, Calvin 과 함께 수출 에이전트인 Paul 의 사무실로 이동하면서. 두꺼운 철문을 통과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행색과는 어울리지 않게 '임대중' 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고급 빌라가 즐비한 곳들 가운데에 출입자들을 일일이 CCTV로 감시하는 Paul 의 사무실이 있었다.]  

 

Calvin의 벤츠를 타고 이동한 Paul 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과정은 무언가 비밀스러웠는데, 운전자인 Calvin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육중하게 보이는 문이 열렸고, 일반 가정집 모양의 외관을 가진 사무실로 들어가서는 비서로 보이는 여직원으로부터 미팅 시간 통보를 기다려야 했다.

 

그녀의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검은색 안경테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는 나의 차림새를 재빠르게 훑고 있었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계약서를 조율할 때만 해도 협의되지 않았던 내용, 특히 샘플이 포함된 제품 전체 물량의 수출 통관에 필요한 비용 부담의 문제가, 내가 나이로비에 와서 미팅을 할 때가 되어서야 새롭게 튀어나온 것이다. 제3국인 두바이가 아닌 굳이 나이로비로 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John의 의도가 명확해졌다.

 

'어이가 없네. Y는 대체 뭘 했길래, 조율은 다 끝났으니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된다고 한 거야? 대표는 또 뭘 한 거고.'

 

애초에 코로나에 대한 위험만 감수하면 된다고 생각해 수락한 케냐와 두바이 출장이었는데, 나이로비에 머무는 동안 내가 꼭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Y와 서울 팀과의 전화 회의를 위해 잠시 Paul 의 사무실 밖으로 나왔을 때]

 

본인이 경험했던 여러 실패 사례를 들먹이며 장황하게 설명하는 프로젝트의 커뮤니케이션 창구이자 담당자인 Y, 이미 내가 나이로비에 와 있음에도 단호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대표. 최악이었다. 

 

"아니,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케냐라구요!! 우간다가 아니라!!"

"예에? 그 말씀을 지금 저한테 하면 저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잠시 사무실 바깥으로 나와 전화 회의를 하던 중 Y의 태평하고, 장황하며, 의미 없는 추정만 가득한 이야기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내지른 소리는 조용히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던 Paul 의 회사 직원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다.

 

서울팀, Y와의 전화 회의 그리고 그 결과를 가지고 다시 John, Calvin 과 협상을 하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던 나는, 다른 클라이언트와의 약속 때문에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는 수출 에이전트 Paul 의 말에, 우선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고 John 과 Calvin 에게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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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내 말에, Clavin 이 찾아간 로컬 레스토랑. 밥그릇을 엎어 놓은 모양의 하얀색 음식이 쌀로 만든 '우갈리 Ugali' 다.]

 

방갈로처럼 생긴 룸 안으로 들어온 나는, 능숙하게 음식 주문을 마친 Calvin 에게 호구 조사를 시도했다.

 

곧이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타운에 있다는 열 살, 여덟 살짜리인 그의 딸들과 영상 통화로 인사했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Calvin 의 말에 대뜸 그 소녀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나를 크게 웃게 만들었다.

 

"BTS! BTS!"

   

[우갈리 먹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나의 요청에 John 이 시범을 보였다. 룸으로 들어오기 전, 문 옆에 꼭지가 달린 물통이 비치되어 있던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Calvin이 주문한 우갈리와 나이로비 토종 닭튀김으로 점심을 먹으며, 그들과 나는 오전 내내 해 왔던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 애썼고, 마침내 적정한 선에서 전체 거래 물량이 아닌 샘플과 1차 거래 물량의 수출 통관 비용만 서로 나누어 부담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Paul의 설명에 따르면 수출 통관에 필요한 허가 서류가 발급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2영업일.

 

세금과 통관 비용 그리고 에이전트 수수료를 오늘 지급한다면, 이틀 후인 토요일에 서류가 나온다는 말인데,

케냐는 토요일에 관공서가 오전에만 근무하니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지만 확률이 반반이라고 했다.

 

이미 Calvin 은 합의한 자기 몫의 통관 비용 지급을 회사 직원에게 지시한 상태.

 

내가 가지고 온 달러는 계약금으로 가져온 것이었고, 우리 몫의 통관 비용은 별도로 지급해야 했으므로, 서울 팀과 협의한 후 오늘 중으로 지급하기로 하고 호텔로 일단 돌아왔다.

 

[주 케냐 한국 대사관의 홈페이지에 게시 중인 나이로비 시내 '코로나 음성 판정 확인서 발급 기관 목록'. 토요일 밤 비행기를 타려면 토요일 오후까지는 발급받아야 했기에 점심 미팅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John 에게 병원부터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통관에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해, 간편하고 신속한 'Western Union'을 통한 송금을 원했던 에이전트 Paul 의 의견이 타당해보였지만, 본인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이번 딜을 온갖 실패 사례만 들먹이며 가나에 앉아서 내게 이것저것 확인해 보라는 말만 해대는 Y에게 정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미 은행 영업 시간이 지나버린 한국에 있는 대표는 여전히 결정을 못하고 있는 채로.

 

그리고 이후 계획했던 모든 일정은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어긋나게 되었는데, 결국 얼마 되지 않는 수출 통관 비용의 지급 방법도 한몫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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