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 일 없이 지나간 하루가 얼마나 대단한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가도록 우리만 애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삶을 잘 보냈기 때문에.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하루는 모두 함께 받는 상과 같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러니 올 한 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멋지고 놀라운 시간이었다고 수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누군가 우리를 애틋하게 보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고, 또 우리도 누군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했고 눈부시게 바라보기도 했을 테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멋진 날이었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해놓은 것도 없이 한 해가 가네 그런 생각 대신.현실로부터 등 돌리지 않은 나. 잘 견딘 나. 도망치지 않은 내가 이렇게 멋지게 한 해의 끝자락을 맞이하고 있다고 흐뭇해 해도 좋지 ..
"대추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늦게 오월쯤 싹을 틔웁니다. 심지어 유월 초에도 삭을 틔우는 대추나무가 있어서, 옛사람들은 느리다고, 양반 나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늑장을 부린 만큼 속도를 내죠. 잎이 돋고 삼 개월이 지나면 제법 실한 푸른 대추를 달고, 푸른 대추는 구월 말이나 시월 초까지 붉은 갈색으로 익어갑니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에 세상의 어떤 책보다 심오한 철학이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온갖 시련을 이기는 인고가 따른다고 했습니다. 태풍에 떨어진 대추들에게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어진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태풍만 불지 않았으면 풋대추로 끝나지 않았을 대추들을..